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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9 (2025년 05월 16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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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초하루 [부처님 일대기]회주큰스님 특별법문(1)

2012.11.23 | 법계월



 

◆회주큰스님 시월초하루 특별법문◆

 

 

  天上天下 無如佛천상천하 무여불

十方世界 亦無比시방세계 역무비로다

나무아미타불

 

금일 초하루기도 법회에 동참하신 우리 불자들께서는 부처님일대기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부처님의 성도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들으시겠습니다.

우리 불자라면 당연히 부처님의 일대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셔야 되고 거기서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잘 새겨들으셔야 되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바로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그 부분, 성도하신내용, 성도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새겨들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지난달에 부처님을 곤란하게 했던 네 가지 여성으로 인해서 일어났던 일중에서 세 가지는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은 네 가지를 다 말씀드렸는데 녹화중에 하나가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더 말씀드리면...

 

부처님을 아주 곤란하게 했던 여자 네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수자타, 부처님께서 거의 생사의

귀로를 헤매실 때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으로 살아나셨다 그랬어요.

그렇지만 자기를 수행하고 도반처럼 따라다녔던 다섯 명의 시종 겸 수행자는 멀리 떠나가

버렸다 했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으셨겠지요.

두 번째는 순다리사건이라고 하는 사건이 있었고 세 번째는 임신을 가장한 여인이

나타나서 부처님을 아주 곤란하게 했다 했습니다.

 

네 번째는 야소다라의 출가입니다.

야소다라는 부처님하고 동갑내기의 태자비였지요.

그런데 야소다라가 얼마나 남편에 대한 생각이 끔찍했던지 부처님께서 저 어느 땅에서 밥을

굶으시고 계신다 하면 자기도 밥을 굶고 부처님께서 침대에 의지하지 않고 나무 밑에서

이슬을 맞고 정진중이다. 는 소리가 들려오면 자기 자신도 나무 밑에 앉아서 이슬을 맞고

있었다. 그랬어요.

 

보통사람 같으면 수행한답시고 떠나간 남편을 얼마나 원망을 했겠습니까?

나를 버리고 간 사람이다 해서 이를 뿌드득 갈았겠지요.

그런데 야소다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랬어요.

참 대단한 여인이지요.

남편이(전남편이었겠지요.)자기가 좋아서 가는 길이라면 내가 흔쾌히 보내드리겠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하시라’ 그렇게 보낸 사람이니까 얼마나 대단한 여자입니까?

야소다라가...

   

그런데 나중에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카필라성으로 한 번 오시게 돼요.

그 때도 야소다라는 경거망동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했습니다.

대단히 철든 여자지요.

야소다라는 부처님의 그러한 여러 가지 공덕을 흠모하면서 출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부처님을

키워줬던 마하파자파티 그 분하고 같이 출가하기를 간청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수행자라는 것은 때로 밖에서 자야할 경우가 있고 탁발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그런 환경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문제도있었겠지만)우리가 봤을 때는 그런 문제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야소다라가 출가를 하려고 많은 시도를 했어요,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거절을 했습니다.

야소다라하고 마하파자파티는 어디까지 따라오느냐?

카필라성에서 발샬리라고 하는 수백리길을 부처님을 따라서 걸으면서 발은 부르트고 피는

철철 흐르고 그러면서도 출가를 하겠다고 때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출가를 아난존자가 대신 전합니다.

부처님의 이모이신 마하파자파티와 야소다라 태자비께서 계속 저러고 있는데 출가를 허락하시지요.

“안 된다. 여성출가는 절대 안 된다.”

세 번이나 거부를 해요.

네 번째는 부처님도 감당이 안되었든지 부처님도 허락을 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해서 야소다라가 출가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 인도는 당시에도

많은 고행자들이 있고 많은 수행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봤을 때는 대부분이 독신수행자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부처님의

여성출가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한 그런 이유, 빌미를 주고 말았지요.

요즘 같은 세월에도 어떤 스님이 출가를 했는데 자기 부인도 같이 출가를 시켜서 산다고

그랬을 때 그 때 당시에는 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같은 집안에서 살지 않았겠느냐 이거지요.

그럴 경우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그 비방과 질투에 섞인 많은 말들 루머들이 얼마나 많았겠느냐 이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야소다라의 출가가 부처님의 입지를 가장 곤란하게 했던 그것도 평생토록

부처님의 약점이 된 그런 빌미가 되지 않았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경전에서는 그러한 것을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않고 있지만 제가 미루어 짐작하건데

야소다라의 출가가 대단히 부처님을 곤란하게 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처음에는 세 번이나 완강하게 거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는가 생각이 돼요.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어찌 되었던 간에 여성에게 출가를 허용함으로서 세계종교 역사상에

가장 남녀평등의 그런 질서를 제창하셨던 분이시죠.

요즘은 비구, 비구니라 하면 누구든지 다 역량껏 법을 펴고 수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 거지요.

어찌 보면 요즘 세월에는 비구니스님들이 더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도 어디 갔다가 오면서 ‘자재공덕회‘라고 중국 대만에서 나온 사찰이 있습니다.

거기에 갔더니 비구니스님이 부처님을 작게 모셔놓고 스님은 아주 높은데 큰 사진으로 모셔놓았더라고요.

아무튼 전무후무한 남녀평등의 종교를 드디어 제창하신 그런 계기가 바로 야소다라의 출가이기도

했지만 야소다라의 출가가 부처님을 곤란하게 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일체 대응하지 않으시고 묵빈대처黙賓對處 하셨다 했어요.

묵빈대처...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묵빈대처

묵빈대처

누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나 하면 거기에 대응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냥 지나가는 거요.

그러면 세월이 다 묻고 지나가는 거지요. 묵빈대처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많은 시련을 거치시면서 가장 첫 번째 사건이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이다 그랬어요.

수자타가 우유죽을 끓이고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니까 그것을 부처님께서 받아 드셨다 이거요.

그걸 보고는 다섯 명의 시종 겸 수행자는 떠나 가버렸다. 이거지요.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더욱 정진에 열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강 언덕에서 원기를 회복하시고 일어나셔서는 저만치 보이는 1킬로 내지 500미터쯤

거리에(지금 거리로 봐서 그렇습니다.)‘핍팔라’라고 하는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유인물 5번에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핍팔라

핍팔라

‘핍필라’라고도 불려지는 이름인데 이 핍팔라는 열대지방에서 많이 나는 그런 나무입니다.

오늘 뉴욕 맨스트리트 그 쪽에서 붓글씨 서책을 하나 사려고 나갔다가 오면서 보리수나무

같아서 가까이 가니까 보리수나무가 아닙니다.

보리수나무하고 잎이 좀 다르더라고요.

온대지방에는 나지 않는 그런 보리수나무지요.

열대지방의 보리수나무가 있고 온대지방의 보리수나무가 있는데 부처님 당시에 핍팔라 나무하고

온대지방의 보리수나무하고는 좀 다릅니다.

있다가 설명을 드리겠고...

 

부처님은 이 핍팔라 나무를 찾아가십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아주 시원하고 뜨거운 열기를 받아주는 그런 나무이고 많은 새들이 나무에

앉게 되는데 특히 이 핍발라는 잎이 아주 무성해요.

그러다보니까 새의 배설물을 다 받다 주지요.

그래서 이 나무가 수행하기에 아주 좋은 나무였던 것 같습니다.

아주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이동하시게 됩니다.

500미터 내지 1킬로미터니까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요.

 

그렇다면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을 드시기 전에는 부처님이 어디에 계셨지요?

고행림苦行林이라 했지요.

고행림에서 고행하시다가 지쳐서 이쪽으로 나오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수자타 유미죽 공양을 드시고 핍팔라 나무를 찾아서 가게 되는 거지요.

이 핍팔라 나무가 후일에 이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셨기 때문에 이 나무가 ‘보리수’ 이렇게

이름이 변하게 되는 겁니다.

‘보리’라고 하는 말이 깨달음이란 말이잖아요.

그래서 보리...깨달음을 이루신 나무다 그렇게 나무이름이 변하게 된겁니다.

보리수의 역할이라 하는 것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뜨거운 열기를 받아주는

그런 의미가 있고 두 번째는 새의 지저분한 배설물을 받아주는 역할을 하는 거지요.

 

네팔이나 인도를 성지순례 겸 NGO활동으로 다녀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동네마다 큰 보리수

나무가 한그루씩 서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당수나무 비슷한 그런 나무가 동네에 반드시 하나 서있어요.

그러면 동네사람들이 낮이고 밤이고 거기에 모여가지고 거기서 얘기도 하고 거기서 누워 자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보리수나무는 동네마다 크게 하나씩 있는 나무라고 생각하면 돼요.

부처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너무나 고마운 나무지요.

나중에 또 나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둘째 주에 이 보리수에게 감사했다 그래요.^^

깨달음을 이루시고 둘째 주에...

 

아무튼 이 보리수가 그렇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지금 보리수, 15번 그림에 보시면

큰 탑이 하나 있고 탑 뒤에 보리수나무가 하나 있어야 하는데 잘 안보이네요.

지금도 이 보리수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보리수나무가 부처님 당시에 보리수나무인가?

거기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데 거기에 많은 설이 있습니다.

많은 설이 있습니다만 제가 취하고 싶은 설은 지금의 보리수나무는 원 보리수의 손자뻘이다

그렇게 봅니다. 손자뻘이라...

부처님 당시의 것이 아니다 이거지요.

 

원래 보리수나무가 1876년에 폭풍우에 쓰러져서 죽었다 그래요.

당시에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라고 하는 그 지방에 있는 보리수 묘목을 옮겨 온 거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원래 부처님 계셨던 그 땅에 지금 핍발라 이 나무가 1876년에 죽게 되었는데

이 나무가 언제 스리랑카로 옮겨지게 되었는가?

2세기 반, 부처님 입멸하시고 250년 뒤에 ‘아쇼카’라고 하는 큰 왕이 나타났어요. 아쇼카대왕...

 

한 번 따라 해보세요.

아쇼카

아쇼카

아쇼카 왕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아요깡이라 그래요.

인도 최초로 인도 전역을 통일했던 대단한 왕이었는데 처음에는 불자가 아니었습니다.

최초로 인도전역을 통일하긴 했겠지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전난을 겪다보니까 인생의 무상을

많이 느꼈다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칼링가라고 하는 전투에서 발심을 했다.

그 전쟁 통에도 스님들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환자들을 돌보고 하는 것을 보고 왕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얘기를 했다 그래요.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분들이기에 환자를 돌봅니까?”

 

“우리는 불교를 믿는 수행자들인데 마음이 아파서 이렇게 할뿐입니다.”

 

거기에 아쇼카 왕이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랬어요.

그 전쟁 통에서 불자들이 그리고 뜻있는 스님들이 아픈 환자를 돌보고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는 불교를 믿게 되었다 이런 얘기가 전해옵니다.

분명히 그런 사건이 있었을 겁니다.

그저 가만히 있는데 종교를 갖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아쇼카 왕이 그런 왕이었는데 자식들도 출가를 하게 돼요.

아마 왕이 권유하지 않았는가 생각이 돼요.

 

왕의 딸 ‘샹가미타’라고 하는 비구니가 나타났어요.

아쇼카왕의 딸이었지요.

그러니까 3세기 부처님 입멸하시고 200여년 지난 뒤의 일입니다.

샹가미타 비구니가 스리랑카에 전법을 하러 가면서 부처님이 앉으셨던 그 보리수나무 그 묘목을

스리랑카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 나무가 아주 컸겠지요.

지금에 있는 보리수나무를 말하는 겁니다.

지금 보리수나무가 1876년에 폭풍우에 쓰러져 죽자 그 샹가미타가 옮겨갔던 그 큰 나무에

그 묘목을 옮겨왔으니까 지금 보리수나무는 부처님 당시의 손자뻘이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이해가 되시지요?

 

지금 보리수나무의 연혁은 그렇고 아무튼 부처님께서는 그 나무 아래에 큰바위, 편편한 바위가

있은 모양인데 그 바위에 앉게 돼요.

딱딱한 바위에 그냥 앉으려니까 불편해 했겠지요.

그 때 길상이라고 하는 청년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목동 같았습니다.

길상이라고 하는 그 청년이 길상이라고 하는 풀을 베어서 부처님 앉는 자리에 깔아주었다 했어요.

14번이 바로 길상초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길상초

길상초

갈대처럼 올라와있지요. 억새풀 같기도 하고...

이것은 니련선하 또는 지금의 붓다가야 근처에 많이 나는 풍입니다.

제가 하도 자상해서 그것을 찍어온 겁니다.^^

 

한 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길상초

 

길상이라는 청년이 길상이라는 풀을 베어가지고 수행자가 그 넓은 바위위에 앉으려니까

신심을 일으켜서 엮어가지고 깔아드린 거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이 앉으셨던 그 자리를 금강보좌라 이렇게 말해요.

 

읽어보겠습니다.

금강보좌

금강보좌

 

바로 이 금강보좌 이 자리에서 큰일을 냅니다.

대단한 일을 냅니다.

그 자리에 탑이 세워지게 되는데 이 탑은 후일에 아쇼카대왕이 조금 흔적을 냈고 그 뒤로 다시

크게 세워지게 됩니다.

이따가 더 말씀을 드리고...

아무튼 여기에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으셨던 겁니다.

보리수나무는 보이지 않는데 탑 뒤에 보리수나무가 있습니다.

보리수는 부처님께서 이 나무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셨기 때문에 후일에 보리수가 곧 상징적인

불교의 상징적인 불교의 나무가 되고 보리수 곧 부처님 이렇게 됩니다.

 

옛날에는 부처님을 모시기가 우리 중생이 부처님 가까이 한다는 것이 미안할 때가 있어요.

부처님한테 절할 때도 어떤 때에는 부처님이 속으로 절만하면 되는 줄 아느냐고^^

아마 그렇게 핀잔을 속으로 주실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업이 두터운 중생입장에서는 부처님 가까이하는 것이 미안하니까 처음에는 부처님

모시기를 좀 꺼려했습니다.

보리수 잎 하나씩 가지고 다니면 부처님 모시는 것하고 똑같이 간주를 하고 다들 그런 신심을 냈습니다.

나중에 가면 보리수나무를 모시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모시는 일이고 부처니 모시듯이 나뭇잎

하나 갖는 것도 신심을 일으키는 일이 되는 거지요.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은 없지요.

보리수는 나중에는 불교의 상징이자 부처님의 상징으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보리수 잎은 남방에서 나는 열대지방에서 나는 보리수이고 온대지방에서

나는 보리수나무는 잎이 조금 닮기는 해도 전혀 다른 나무입니다.

북방불교 쪽에 있는 분들은 보리수나무를 흠모해서 그랬든지 비슷한 나무를 보리수라 하고

열매가 좋은 열매가 많이 납니다.

온대지방에서 나는 보리수나무 열매...그 열매를 가지고 염주를 만들어서

보리수염주다. 보리자염주다 해서 많이 돌리는데 내가 보기에는 어떤 염주보다도 그런

보리수염주가 제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돼요.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그런 의미가 있는 거니까 다른

염주보다는 좋지 않겠는가? 생각이 돼요. 

                                         

우리 대구 큰절 마당에도 20년생 보리수나무가 두 그루 있습니다.

올해 우리 절에 온지가 2년 되었는데 염주를 몇 개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참좋은 이서중고등학교 교정에도 20년 된 보리수나무가 두 그루 있어요.

학교 다니다 보면 교목이 있잖아요. 참좋은 이서중고등학교 교목이 보리수입니다.

교화라고 있지요. 교화는 또 뭐겠습니까?

당연히 연꽃입니다.

완전히 불교 학교가 된 거지요.

또 20년생 두 그루 나무가 있는 곳이 감포도량...

스님들의 수행처인 바로 무문관 선방이 있는 그 곳에 20년생 나무가 두그루 있습니다.

총 여섯 그루가 온대지방에서 나는 20년생 보리수나무가 있습니다.

우리 뉴욕도량에 계시는 분들은 혹시 한국에 가게 되거든 보리수나무를 꼭 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리수나무는 우리들에게 그만큼 큰 중요한 의미를 주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아래서 부처님께서는 앉으셨는데 그 앉은 자리 반석, 앉은 자리를 금강보좌라 했고

금강보좌에 앉으시면서 부처님은 결심을 해요.

그 결심이 대단한데....

‘내가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랬는데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설령 내 피부와 뼈와 살이 모두 말라버린다 하더라도 나는 대각을

이루지 않고서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백 개의 벼락이 동시에 쳐서 나를 겁준다 하더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않고서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대단한 의지입니다.

이런 의지가 없으면 큰일을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이런 대단한 굳건한 의지 내가 이제 마지막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것 같습니다.

6년 수행 끝에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목표했던

목표점에는 도달하지 못한 그런 자괴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봐요.

일국의 태자가 보통 집에 한 사람이 출가하는 것도 온 동네와 집안이 다 시끄럽거든요.

‘나를 죽여 놓고 출가해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출가 못한다.’

그렇게 출가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집에서 순순히 ‘그래, 출가해라’ 그렇게 하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요즘은 공부 중에 제가 물어보면 그래도 상당수 분들이 자기자식이 출가한다면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오히려 출가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뉴욕도량에 제가 한 번 물어 볼게요?^^

“자기자식이 출가한다면 나는 보내겠다.”라는 사람 손들어 봐요.

“아! 불교의 맥이 끊어지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반쯤 손을 들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런 집안에는 또 애가 출가하려고 하지 않아요.^^

죽이 맞아야 되는데 부모가 출가하기를 원하면 애가 반대를 하고 애가 출가하기를 원하면 부모가

반대하고 그러니 출가자가 잘 안 생기는 겁니다.

 

당시에 싯다르타태자, 부처님 이름이 어릴 때 싯다르타잖아요.

싯다르타가 출가를 했다는 것은 엄청난 많은 쇼크를 준겁니다.

엄청난 쇼크를 백성들한테 주었고 그 많은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계속 수행을 했던 거잖아요.

‘내가 여기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 업을 다 어떻게 하느냐?’ 이거지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냥 소시민이 출가를 해도 마음의 짐이 되어서 부모님한테 불효하는 일이 없이 하려면 열심히

해야지 이런 마음을 갖는데 태자의 마음은 얼마나 더

했겠느냐 이거지요.

그래서 아마 싯다르타 태자만이 대각을 이루셨던 그 요인 중에 하나는 아마 그런 점도 있었지 싶어요.

내 생각에는...

 

드디어 금강보좌 위에 앉으시면서 그런 결심을 했지만 대각이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마왕 파순이라고 하는 마왕이 나타났어요.

끊임없이 부처님을 계속 훼방을 합니다.

온갖 나쁜 짓을 다하면서 부처님을 방해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보면 부처님께서는 항마, 마구니를 항복받으시고 깨달음을 이루셨다해서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라 그러잖아요.

팔상성도에 보면 수하항마상이 안 나옵니까?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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