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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9 (2025년 05월 1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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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초하루 기도법회 회주큰스님 특별법문[부처님일대기 두번째이야기-태로자로의 부귀영화, 그리고 번민]

2012.06.23 | 법계월



 

◆ 회주큰스님 5월 초하루 특별법문

 

 天上天下 無如佛 천상천하 무여불

十方世界 亦無比 시방세계 역무비로다

나무아미타불

 

모두 따라하십시오.

천상천하의

부처님 같은 분 없으니

시방세계에 견줄 데 없도다.

 

 

  창건 20주년 특별법문   태자로서의 부귀영화, 그리고 번민

  부처님 일대기②

 

 

오늘 받으신 유인물을 보시면 [창건 20주년 특별법문]이라 되어 있고 [부처님 일대기]

두 번째 유인물입니다.

부처님 일대기 공부를 계속 해가겠습니다.

위대한 성자를 자세히 알려면 그 분의 전기를 보면 알 수 있을텐데 바로 부처님도 부처님의

일대기를 통하면 부처님의 여러 가지 많은 공덕과 행적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일대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나누어 드린 유인물을 보시기 바랍니다.

초하루 법문이라 해서 이렇게 자상하게 유인물을 나눠 주는 절은 없어요.

그래서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가 잘났다 하고 우학스님이 자상하다 그럽니다.^^

이 유인물은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많은 자료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서서히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유인물 제목이 [태자로서의 부귀영화, 그리고 번민]이라 되어 있는데 이때의 태자이름은 뭐지요?

“싯다르타”

읽어보겠습니다.

싯다르타

싯다르타, 또는 싯달타라고 불리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젊은 시절 이름 싯다르타태자입니다.

태자는 BC 몇 년에 태어났지요?

“BC 624년”

 

불기2556년 거기다가 80을 더하면 부처님께서 나신 BC 624년이 돼요.

여기에 대해서는 이따가 더 말씀을 드리고 2번을 보세요.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한 여인이 있어요.

이 분이 마야왕비, 마야부인, 마야데비라고도 해요.

마야왕비가 모셔져 있는 룸비니동산의 그 집을 마야부인당이라고도 하고 마야데비전이라고 합니다,

마야데비가 원음인데 줄여서 마야부인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마야데비

마야데비

마야데비전 또는 마야부인당에 모셔져 있는 조각상인데 나뭇가지를 잡고 애기가 났어요.

그 아래 천상천하 유아독존 탄생게를 외치고 있고 천지인을 짓고 있네요.

그 옆에 보면 수염이 길게 난 할아버지 한 분이 보이고 있어요.

 

이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아시타라고 하는 관상쟁이입니다. 아시타선인입니다.

여기 마야데비젼, 마야부인당은 현재는 없어요.

옛날 마야부인당입니다.

갈 때 마다 부처님의 성지의 이런 유품들이 바꿔져 있어요.

마야부인당, 마야데비전 집자체가 다시 지어졌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더니 이런

성지에 박물관 같은 유적지도 변하더라는 거지요.

여러 차례 인도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완전히 알 수 있다, 완전히 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저는 여러 차례 인도를 갔다 오면서 이 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도 여러 도량이 다 그렇고 특히 대구 큰절은 1년이나 2년 정도

안 오면 길을 찾지 못해서 못옵니다. 많이 변해서...^^

제가 쓴 ‘인도성지순례’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아주 두툼한 책인데 그 책에 이 그림이 실려져 있는데 작년에 인도에 갔을 때는 이 조각상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자료를 올려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앞에 할아버지가 손을 벌리고 있는데 이 분이 아시타선인이라.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 三界皆苦我當安之삼계개고아당안지를 외치고 있는

 

싯다르타태자와 아시타선인의 만남은 태어나서 약 5~7일 만에 만났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당시 풍습에 따라서 애기가 태어나면 5~7일쯤 애가 안정될 때 쯤 되면 관상 보는 사람한테

 

얼굴을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때 아시타선인이 싯다르타태자의 용모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랬어요.

 

바로 우리 석가모니부처님은32상 80종호라고 하는 거룩한 몸의 모습 또는 얼굴모습을

 

가지셨다 그랬습니다.

 

32상 80종호 들어보셨습니까?

 

 

한 번 따라 해보겠습니다.

 

32상

 

80종호

 

그래서 32상 80종호를 아시타선인이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는가?

 

이 사람은 분명히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아닌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되거나 또는

출가한다면 삼계대도사가 되어서 일체중생을 제도하실 대단한 위인의 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타선인이 자기는 이미 늙었고 노인이 되어서 성장후의 싯다르타태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더라는 것입니다.

싯다르타태자하고 룸비니동산에서 마야왕비가 애기를 낳고 있는 것하고 아시타선인이 만난

장소는 그냥 극적으로 한꺼번에 모아 놓은 것이지 사실은 아시타선인이 싯다르타태자를 만난

것은 왕궁 안입니다.

 

이것은 미술작품이기 때문에 동시적으로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고 있지요.

특히 부처님일대기에서 아주 중요하게 등장하는 선인이 아시타라고 하는 관상쟁이라는 겁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탄생을 하셨습니다.

이때 정반왕의 나이가 얼마였느냐?

싯다르타태자의 아버지 숫도다나왕 정반왕의 나이가 45세였어요.

이때 마야왕비의 나이도 40세가 넘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싯다르타태자에 대해서 기대를 했겠습니까?

이제 첫 애가 태어났어요.

 

정반왕의 대를 이을 첫아이가 경치도 아름다운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생게를 외치고 태어나셨는데 룸비니동산이 탄생지라면 룸비니동산이 어떻게

부처님의 탄생지일까?

이것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고증이 되었을까?

그리 먼 세월이 아니었어요.

아쇼카라고 하는 대왕이 석주를 세웠다.

이 석주는 지난달 부처님일대기 그림에 다 나와 있습니다.

돌로 된 기둥...

 

거기에 이곳이 바로 부처님이 태어나신 성지이다.

바로 여기가 룸비니라고 하는 곳인데 나 아쇼카가 218년 부처님 입멸하신 이후 내가

218년 만에 아쇼카라는 대왕으로 즉위를 했는데 룸비니동산에서 들려서 석주를 세우면서

세금을 감면해주노라 하고 석주에 남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이 분명한 부처님탄생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만약에 아쇼카대왕의 석주가 아니었으면 이곳이 룸비니동산 부처님이 탄생하신 땅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뻔한 그런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공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상세한 그 얘기들은[다음까페 불교인드라망]에 들어가 보시면 자세히 지난 달 법문을 다 볼

수가 있고 오늘 나온 법보시 여기에도 보면 아주 상세하게두 번에 나누어서[거룩한 탄생 아~ 룸비니]

이편에 다 나와 있습니다.

불교인드라망과 월간 법보시를 통해 보시면 부처님 일대기 특히 탄생설화 탄생에 관계된 여러

가지 많은 얘기들을 접할 수가 있을 겁니다.

오늘 이 얘기들은 다음 달 월간 법보시 또 불교인드라망에 정리를 해서 올려놓겠습니다.

돌로 된 기둥, 아쇼카대왕의 석주에 이 곳이 부처님 탄생지이다. 룸비니라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룸비니동산이 부처님탄생지 성지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우리들은 늘 기록을 해둬야 돼요. 기록...

불자들은 머리도 그렇게 좋지 않으면서 적지를 않는데 지금 받아 적으시는 분들은 착한 분들입니다.

제가 하는 얘기들은 아주 방대하기 때문에 기록해 두지 않으면 이런 엄청난 대사건들도 잊혀진다는

거지요.

 

다시 거꾸로 생각해서 부처님의 어머니가 룸비니동산에 오시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카필라성, 카필라 바스투, 카필라 왕궁에 있었습니다.

낳은 애기를 데리고 바로 카필라왕궁에 가게 됩니다.

카필라성을 인도말로는 카필라 바스투라고 말해요.

이 카필라왕궁이 있었던 터가 유감스럽게도 두 개가 있어요.

인도정부가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가 있고 네팔정부가 주장하는 왕궁터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룸비니동산은 인도에 있습니까? 네팔이 있습니까?

인도차이나반도 속에 있어서 똑같다고 하지만 현재의 굳이 나라개념을 말한다면 룸비니동산은

네팔소재입니다.

네팔소재에 룸비니동산이 있고 여기서 머지않은 두 곳에 1번 인도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가 있고 3번 네팔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쓴 인도성지순례 책에 등장한 카필라왕궁 터는 네팔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입니다.

역사가 2,500년 거의 3,000년 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룸비니동산도 아쇼카석주가 유럽

사람들로 부터 소개되고 비문이 해독되기 전에는 거기가 룸비니동산인데 이곳이 부처님

탄생지였다는 것이 잊혀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1번, 3번 인도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나 네팔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는

이곳에 아무런 기록이 없어요.

많이 세웠다는 아쇼카석주도 1번, 3번에 없어요.

인도에서는 인도 나름대로 카필라왕궁 터는 우리 땅에 있다.

네팔에서는 네팔대로 카필라왕궁 터는 우리 땅에 이것이 진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거지요.

서로 카필라성 유산이 자기 땅에 있다.

그것이 관광자원으로 훌륭하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겠고 자기들이 부처님을 모시고 싶은

그런 마음에 인도나 네팔은 그런 주장들을 하는 거지요.

 

인도하고 네팔하고는 국경이 있어요.

국경이 어떻게 생겼는가?

거기 4번이 국경입니다.

네팔과 국경의 옛날국경이라 했네요.(인도 성지순례에서 사진 발췌)

이것이 언제 여기 가서 찍은 사진이냐?

20년 전입니다.

20년 전 제가 인도성지순례를 처음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그때는 인도성지순례를 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입니다.

막대기 하나가 국경선이요.

지금은 어떠냐?

여기가 대도시가 되어버렸어요.

큰 도시가 형성이 되어서 온갖 먹을 것이 꽉 찼고 온갖 입을 것이 꽉 찼고 두 국가를 왕래하는

차량이 정체가 될 정도로 엄청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고 또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차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대구 큰절 주위에도 주차문제 때문에 늘 말썽이 많은데 주차문제는 시골에 가도 문제가 많습니다.

아직은 후진국가입니다.

이런데도 차 문제 때문에 보통 문제가 아니요.

바야흐로 세상은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동시에 성장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거기 5번 그림 봐 봐요.

5번 그림이 노천가게에서 사과, 석류...나도 얼굴이 검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들하고

있으니까 희네요.^^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은 인디언이라 얼굴이 검잖아요.

이러한 가계도 많고 많이 변했습니다.

대단히 번잡스럽고 사람도 엄청 많습니다.

5번이 바로 현재의 네팔과 인도의 국경에서 사과를 팔고 옷감을 파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번의 룸비니동산에서 4번, 5번의 국경까지 가는데 어느 정도 걸리느냐 하면 한 시간쯤 걸려요.

2번의 룸비니동산에서 네팔 같은 네팔 안에 3번까지 가는데 30키로, 버스로 천천히 가서 한

시간쯤 걸리지요.

만약에 네팔에 있는 카필라왕궁 터가 진짜라면 카필라왕궁에서 30키로 가서 룸비니동산에서

애를 낳았다는 거지요.

애를 낳아서 바로 돌아온 거지요.

 인도에서 주장하는 1번 왕궁 터를 봐 봐요.

1번하고 2번 룸비니동산하고의 거리는 70~80킬로미터 정도 돼요.

약 두 시간 쯤 돼요.

마야왕비가 애기를 낳으려고 자기 친정 콜리성으로 가다가 룸비니동산에서 애를 낳은 것 아닙니까?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30키로, 또는 70~80키로가 큰 문제든 되지 않지요.

그러니까 두 나라가 자기 땅의 카필라성이 진짜라고 말하는 거지요.

룸비니동산에서 1번 인도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까지는 약70~80키로,네팔의 룸비니에서

 

인도의 카필라성까지 가려면 국경선을 넘어서야 되잖아요.

바로 국경선까지가 약 한 시간

국경선을 넘어서서 인도주장의 카필라왕궁 터까지가 한 시간 70~80키로라 하지만 약

두 시간쯤 걸리는 인도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가 있다 이 말이지요.

2,600년 전 사실을 고정한다는 것이 사실은 예사문제가 아니지요.

1번과 3번 두 그림 중 하나는 카필라왕궁 터다 이렇게 보면 돼요.

부처님께서는 1번 또는 3번 이 왕궁 터에서 29세까지 살았습니다.

오늘의 본 주제는 부처님께서 29세까지 어떻게 사셨을까 그거지요.

 

왕궁 터가 어디가 진짜인지 이렇게 애매한 것처럼 사실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연도도 아직도 불문명해요.

아까 몇 년도에 태어나셨다 했지요?

BC 624년도에 태어났다 했는데 이것은 구전으로 구전으로 내려와서 특히 남방 미얀마, 인도

이쪽에서 부처님은 BC 624년도에 태어나지 않으셨겠는가?

이렇게 추정을 하는데 요즘은 역사과학이 발달하다 보니까 이것을 다시 많은 자료를 갖다 되고

고정을 시작했어요.

이것이 좀 엉터리가 아니냐? 이렇게 봐요.

 

북방설에서는 불기가 몇 년이냐?

부처님이 몇 년 전에 태어나셨는가?

BC 1027년 설을 가지고 있어요. 북방설...

옛날 30~40년 전에 절 기둥이나 석주에 보면 불기 3천 몇 년 이렇게 써 놓았어요.

그것이 다 북방설 때문에 그렇습니다.

북방설에서는 훨씬 더 빨리 4, 5백년 전에 부처님을 본거지요. BC 1027년.. 남방설에서는

BC 624년 이랬는데 이것을 1950년도 이때에 전 불교도들이 다 모여가지고 북방설은 말이

맞지 않으니까 남방설을 표준으로 하자.

이렇게 해서 부처님 탄생 년도를 공통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BC 624년인데 이것 또한 엉터리가

아니냐 이거요.

 

전문역사학자들은 남방설에 근거한 불기 부처님탄생을 좀 더 늦게 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BC 566년으로 봐요.

그러니까 58년이 더 늦은 겁니다.

BC는 연대가 올라갈수록 뒤로 가잖아요.

BC 566년 설이 거의 정확해요.

왜 이렇게 확신하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가?

부처님의 탄생 연대를 당시에 왕들 부처님하고 직접적으로 관계되었던 빔비사라 왕이 있었지요.

 

빔비사라 왕이 누굽니까?

최초의 사찰이 뭐지요?

우리 교단사에 있어서 최초의 사찰은 죽림정사지요.

 마갈타국의 빔비사라 왕이 시주한 절이 죽림정사입니다.

마갈타국의 빔비사라 왕하고 비교를 해보면 부처님께서 언제 사셨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얘기했던 아쇼카대왕하고 비교를 해 보면 부처님께서 언제 성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시 왕들의 재위기간과 비교를 해 보면 거의 정확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요즘 많은 역사학자들이 연구를 해보니까 아까 얘기했던 부처님 탄생이 BC 566년이었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를 시주했던 왕 불교 고단사의 아주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빔비사라왕의

재위기간이 언제냐?

BC 545년에서 BC 494년 그 때가 재위기간입니다.

빔비사라왕의 아사세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사세가 빔비사라 왕을 폐위시키고 아들이 나중에 왕이 돼요.

그 때가 BC 494년입니다.

BC 494년이 아들 아사세가 왕권을 찬탈하고 자기가 왕이 되었는데 빔비사라 왕의 마지막 연도지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연세가 얼마냐 되었느냐?

72세요.

빔비사라왕이 폐위되던 그 때 부처님의 연세가 72세라.

부처님께서는 몇 세까지 사셨지요?

“80세”

8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빔비사라왕의 마지막 연도가 494년이었으니까 여기서 8을 빼면 BC 486년이 입멸년이 돼요.

부처님 입멸년...

이것을 다시 거슬러서 부처님이 80세까지 사셨기 때문에 80을 더하면 탄생한 연도는 BC 566년이다

이 말입니다.

 

빔비사라왕의 기준을 보더라도 BC 566년에 탄생하셨다는 겁니다.

또 다른 하나의 고찰 근거로는 아까 말씀드렸던 아쇼카대왕입니다.

전륜성왕...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아쇼카대왕 아쇼카대왕의 재위기간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218년이 된 뒤에 왕이 나타났어요. 열반 드신 바로 그해부터 떠져보면...

그때 재위기간이 얼마냐?

BC 268년에 즉위해서 BC 232년에 돌아가셨어요.

이런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합니다.

BC 268년에 즉위...BC 232년 폐위...

아쇼카왕이 즉위한 연대는 아쇼카석주 등 비문의 기록이 정확하게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218년 되는 해에 즉위를 했기 때문에 218과 268을 더하면 부처님의

열반연도는 BC 486년이요.

열반에 드신 것이 BC 486년이었기 때문에 탄생은 80을 더하면 BC 566년이 된다 이 말입니다.

아쇼카대왕의 즉위를 표준으로 보더라도 부처님의 탄생연도는 BC 566년이맞다는 겁니다.

 

세 번째 또 다른 자료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제1차 결집이

있게 되었습니다.

제1차 결집은 경전편찬 작업 제1차 모임이지요.

七葉窟칠엽굴에서 이루어졌다 그랬습니다. 칠엽굴...

부처님께서 막 돌아가시고 전격적으로 칠엽굴이라는 굴에서 500명의 부처님제자들이 모여서

바로 경전편찬 작업을 했지요.

물론 그때는 구두로 했다 이거지요.

그때는 우바리존자라고 하는 사람이 율을 외웠어요.

우바리존자가 그 뒤로부터 하안거를 마치고 인도는 하안거만 있습니다.

우기철이기 때문에 하안거만 있어요.

하안거를 마치고 우바리존자가 가지고 있는 율장에 점을 찍기 시작했어요.

일 년에 한 개씩...

이것이 계속 이어져왔다는 거지요.

 

한 번 따라해 보세요.

상가바드라

상가바드라

‘상가바드라‘라는 스님까지 전해져 왔는데 ’상가바드라‘라는 스님이 서기489년에 중국

광동성에서 975, 975번째의 점을 그때 찍은 거요.

서기489년에 975개의 점을 찍었다 이거요.

975에 서기489니까 그것을 거꾸로 환산해 가면 이것을 ‘중성점기‘라이렇게 말해요.

 

衆聖點記 중성점기... 무리 중衆, 성인 성聖, 점 점點, 기록할 기記자입니다.

점을 찍어가지고 부처님께서 언제 나셨는지 표시를 했다는 겁니다.

 

중성점기설, 중성점기라 말하는데 이 중성점기에 위해서 상가바드라가 중국 광동성에

들어왔을 때 975번째의 점을 찍었는데 그 때가 489년입니다.

975개의 점에 489를 빼면 BC 486이 돼요.

열반이 486이 되는 거지요.

열반 해에 점을 처음 찍기 시작했으니까...

중성점기를 보더라도 부처님께서는 BC 486년에 열반에 드셨고 탄생은 80을 더하면

BC 566년이 된다 이거지요.

 

이 세 가지 자료를 본다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연대가 BC 624년이 아니라 BC 566년이라는

것이 확실해요.

지금의 불기하고 약58년의 차이가 있고 58년 늦게 부처님이 태어나셨다 이렇게 보면 돼요.

이쯤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전한가?

회의를 느낄 때가 있어요.

우리는 BC 624년이 부처님 탄생연대라고 생각했는데 BC 566년이 더 증설이 된거니까요.

 

그림1번, 3번의 카필라궁전도 그렇습니다.

3번의 네팔 쪽 궁전 이것은 동문이거든요.

네팔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에 동문 쪽에서 허리 굽은 노인을 발견하고 봤다 이랬거든요.

네팔 쪽의 왕궁터만 보다가 뜬금없이 1번 여기가 인도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도 있다는 겁니다.

제가 작년에 여기를 가보게 되었어요.

룸비니메타스쿨 룸비니학교하고 룸비니도량을 건립 차 여기에 가게 되었어요.

인도에서 주장하는 카필라왕궁 터를 가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니까 혼돈이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뭐가 진짜냐?

카필라왕궁 터가 네팔에서 주장하는 것이 진자인지 인도에서 주장하는 것이 진짜인지

그래서 지식에 대한 회의를 많이 가졌습니다.

지식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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