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종합대학인 인도 나란타대학(那蘭陀大學). 굽타왕조의 왕 쿠마라굽타
1세(415~454)를 시작으로 여섯 군주가 수백년 동안 불사를 이어갔던 곳이다. 오래전
석가모니 부처가 전법교화를 펼치기도 했던 곳은 대학이 들어선 후 많은 승려·학자가
했다.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 스님도 이곳에서 유학하며 불교를 배웠다. 나란타대학은
1915년 발굴된 규모만 남북 500m, 동서 250m에 이른다. 대규모의 사역(寺域)에서는
사각형의 수행처와 5동의 사찰, 10동의 승방(僧房)터가 발굴됐다.
한국에도 나란타대학 같은 곳이 있다.
대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한국불교대학(舊 영남불교대학) 대관음사가 그곳이다.
대구시 남구 봉덕3동 대로변에 자리한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는 연건평이 5000여
평에 이르는 매머드급 도심사찰이다. 지하2층 지상7층 건물에는 법당과 강원, 선방,
출판사, 스튜디오, 박물관, 도서관, 서점, 꽃집, 용품점, 어린이집과 유치원, 노인전문
병원, 납골당 등 없는 시설이 없다.
회주 우학 스님은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를 20여 년 전인 1992년 5월부터 신도들과
한마음으로 일궈왔다. 2012년 5월 15일이면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가 창건한 지 20년이
된다. 우학 스님 만의 비전과 리더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교대학’ 플랭카드만으로 140명 모아 스님이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를 창건한 것은 우연, 아니 운명이었다.
삼촌의 죽음을 통해 생사일대사에 큰 의문을 품기 시작했던 스님. 우학 스님은 행자시절
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꿰고 있었다. 출가를 반대했던 식구, 친구를 피해 양산 통도사에서 남양주 봉선사까지 갔지만, 큰그릇을 알아본 월운 스님은 우학 스님을 다시 통도사로 돌려보냈다. 스님은 생명에 대한 고민을 풀고 싶어 선방을 전전했다. 선방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우학 스님의 고민은 풀리지 않았다. ‘한국 간화선은 막무가내로 체계가 없다’는 생각에 동국대 선학과도 가고 강원에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를 지나는데 포교당 한 곳이 운영이 안돼 교회로 넘어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부처님이 앉았던 곳에 십자가가 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50만원의 포교당 살림을 시작했다. 신도 몇몇이 참기름을 팔며 포교당의 보증금이며 월세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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