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해외포교,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한국불교의 국제적 활동 즉, 해외포교의 역량은 어느 정도일까. 단, 한마디로 극히 미미하다. 개신교가 해외로 내보낸 선교사는 1만 4086명인데 비해 한국불교의 맏형격인 조계종이 해외로 내보낸 포교사는 고작 41명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불교의 분위기는 우물 안 개구리의, 극히 자폐적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포교에 있어서, 간화선 등의 수행방법 보급도 그렇지만 일반 불교신행활동 또한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집안에서만 큰소리치지 밖에 나가서는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한다. 차라리, 해외에 있어서 한국불교의 활동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야 옳다.
얼마 전에 영남불교대학 관음사가 우리 교민 10만명이 사는 중국 칭다오에 분원을 내려고 현지 조사를 하던 중에 큰 충격을 받았다. 칭다오와 그 인근도시를 포함하여 한국인 교회는 46개가 있는 반면에 한국인 사찰은 고작 한 두 곳뿐이었다. 교회는 신자가 5000명이 넘는 곳도 있었다. 칭다오의 불자한인들은 우리 조계종 사찰이 문을 열던 날 감격의 눈물을 쏟아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자들은 지금까지 가정집을 전전하면서 예불, 기도 등 신행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칭다오 불자들은 내게 수차례에 걸쳐서 간곡하게 분원설립을 요청해왔고 거기에 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해외사찰 건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현지에 적응할 만한 스님을 확보하는 일이다. 적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의지와 원력인데 그러한 조건을 갖춘 스님들이 거의 없으니 참으로 큰일이다. 수년 전에 영남불교대학 관음사에서는 뉴욕에 분원을 건립하려고 준비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 시민권을 가진 우리 교포 명의로 종교법인을 설립하고 사무실을 내게 되었는데 그때도 나는 참담함을 금할 길 없었다. 한인 50만명이 사는 뉴욕이라는 그 세계적 도시에 그런대로 사격(寺格)을 갖춘 절이 몇 없었다는 것이다.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법당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것이 현재 우리 한국불교의 해외포교 실정이다.
혹자는 말한다. 해외포교라고 하면 그곳 현지인을 상대로 포교해야 되지 않느냐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현지인을 위한 포교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교민들을 상대로 한 포교라도 해야 한다. 이것은 포교라는 거창한 말을 빌리기 이전에, 우리 불자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사찰을 세우고 법당을 낼 필요가 있다. 본래 불자였는데 나갈 마땅한 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들으면서도 여기에 대한 각성이나 아무런 대비책이 없다면 이는 승려로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총무원에서 포교에 대한 예산을 늘인다는 데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며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해외포교부분에 대해서도 관심과 지원이 있었으면 한다. 우리 한국의 모든 스님들은 차려놓은 밥상 앞에만 앉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밥을 지을 각오를 세워야 한다. 모든 사찰의 기능은 포교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수행도 그렇다. 수행의 마지막 종착역이 포교가 되었을 때 그 수행이 원만하여진다.
불교가 포교를 등한시 한다면 더 이상 불교는 없다. 그래서 포교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의 과제인 것이다. 즉 포교활동은 불자로서 살아가야 할 존재의 이유가 된다. 포교는 국내 영역과 아울러 해외영역 또한 너무나 중요하다.
물설고 낯 설은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한과 애환을 달래줄, 정신적 귀의처인 법당을 설립하는 일은 큰 공덕이 될 것은 분명하다. 우리 한국불교의 포교도 글로벌시대에 발맞춰야 한다.
[불교신문 2285호/ 12월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