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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구역 사이로 흐르는 보원사지 옛 모습은?

2015.06.28 | 정진해 문화재전문기자



서산 마애삼존불 입구에서 용현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을 지나면서 펼쳐진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이곳이 상왕산 보원마을에 자리했던 보원사 절터이다. 동쪽의 수정봉 줄기와 서쪽의 상왕산 줄기가 고풍저수지로 이어지고 그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넓은 절터에는 5층 석탑을 중심으로 앞에는 당간지주, 뒤에는 부도와 탑비가 옛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 보원사지 전경     ©정진해
 

내(川)사이 두고 금당지역과 당간지역 나눠, 첫 번째 발길은 당간지주에 닿아

언제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시대를 읽어 한줄기 역사를 옮겨놓았다. 추정이라 하면 가장 알맞은 표현인 것 같다.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의 백제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의 각주에서 의상화엄전교십찰을 기록한데서 미리사, 화엄사, 부석사 해인사, 보광사, 갑사, 범어사, 옥천사, 국신사, 청담사, 보원사를 10산 10사찰에 속해 있어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이곳에 보원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당간지주     ©정진해
 

일대의 일부는 경작지로 남아 있고, 발굴조사과정이 끝나면서 내(川)를 사이에 두고 금당지역과 당간지역으로 나누어 잘 정리되어 있다. 당간지주 지역에는 석조가 자리하고, 금당지역에는 건물터와 오층석탑, 승탑과 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두 지역 사이에 흐르고 있는 내(川)는 원래부터 이곳으로 흐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폭우로 인해 기존의 물줄기가 막히고 새롭게 나타난 물줄기가 지금에 이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당간지주지역에는 건물지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서 석조가 있다는 것은 분명 건물지가 있었음을 의미하며, 내를 사이에 두고 오갔다는 것은 내에 석교 또는 목교가 있었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오랜 역사의 흐름은 알 수 없지만 궁금한 것이 남아 있는 것은 앞으로 더 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의 흐름의 밝혀지리라 생각된다.

넓은 들판에 첫 번째 발길이 닿는 곳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이다.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당간을 세워 깃발을 달아 두었던 곳이다. 당간은 남아 있지 낳고 당간을 지탱하였던 지주만 남아 있다.
 
4개의 동로 이루어진 갑석의 바깥 면에는 연화문(안상)을 새겼고 지주 사이에 원좌를 두고 중간에는 원공을 파고 주변에는 철통을 끼울 수 있도록 원형의 홈을 만들었다. 지주는 바깥면의 가장자리 상부에까지 넓은 띠를 새겼고,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으나 지주의 아래쪽에는 간공을 각각 한 개씩 두었다.

 
▲ 석조     ©정진해
 


당간지주의 북쪽방향에 자리하고 있는 석조(보물 제102호)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사용하던 돌그릇으로 장방형의 형태이다. 화강석으로 만든 석조는 밑바닥은 평평하며 한쪽에 배수구를 두었다. 쌀을 씻는다면 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이다.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에 세우는데, 이 석조가 당간지주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주변에 승려들이 기거했던 건물이 있지 않을까 한다.
 
당간지주 지역 석조가 자리, 금당지역 건물터와 오층석탑, 승탑과 탑비가 자리

개울을 건너야 금당지로 향할 수 있다. 내 좌우에는 크고 작은 돌에 징검다리가 있다. 조금이라도 물이 많으면 건널 수 없는 개울로 바꿔진다. 창건 당시 이곳에 개울이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건물터와 개울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큰 돌로 축대를 쌓은 곳도 아니다.
 
다시 발굴과정을 거친다면 당간지주 앞쪽으로 원래의 물길이 있지 않을까 한다.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처럼 극낙전지역과 대웅전지역 사이의 개울에 능파교가 있듯이, 이곳에는 아무런 다리가 놓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층석탑(보물 제104호)로 가는 길에는 소맷돌이 있던 흔적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오층석탑이 반듯이 세워져 있다. 백제 때의 사찰이나 석탑은 고려기대의 석탑이다. 금당지 앞에 자리 잡은 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백제계의 석탑 양식을 잘 따른 석탑이다. 하대석 각 면에는 3구씩 사자상이 다른 자세로 새겼고, 상대석의 각 면에는 2구씩의 팔부중상을 새겼는데, 이러한 조각은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1층의 몸돌 각 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몸돌을 받치는 받침돌은 고려석탑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몸돌의 네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이러한 양식은 백제계 석탑 양식에 나타나는 것으로, 옛 백체지역의 특색을 잘 나타난다. 지붕돌받침은 5단으로 모각하였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고, 다른 부재는 없고 찰주만 남아 있다.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 오층석탑     ©정진해
 


금당지 뒤 남쪽에는 법인국사탑(보물 제105호)이 자리하고 있다. 법인국사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활약했던 승려이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왕사로, 974년에는 국사로 되었으나 이듬해에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은 ‘법인(法印)’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보승(寶乘)’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8각의 기본양식을 갖춘 탑의 지대석은 5장으로 구성되고 기단부의 하대석은 2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8면에는 사자 상을 조작하였고 윗돌에는 구름 속에서 용트림하는 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모서리마다 꽃을 새겼다.
 
중대석은 8면에 조식이 없으며 상대석은 앙련을 두르고 그 위에 난간을 새긴 것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8각의 몸돌 앞뒤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을, 양쪽에는 사천왕상을,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을 새겼다.
 
지붕돌은 넓고 두껍고 밑에는 서까래를 표현하였다. 윗면의 내림마루 끝에는 귀꽃을 새겼다. 상륜부에는 복연이 조각된 복발과 그 위로 굽이 달린 3개의 보륜이 차례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수법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법인국사탑     ©정진해
 


탑 오른쪽에는 거북이 몸에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한 법인국사탑비(보물 제106호)가 있다.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있고 눈은 튀어 나와 있다. 비좌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세웠고, 이수는 네 귀퉁이에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조각하고, 앞과 뒷면에 구름무양을 새겼다. 비문에는 법인국사가 광종 25년(974)에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입적,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한윤이 썼다고 하였다.

금당지 좌측의 건물터에는 이곳에서 수습된 석등, 석탑, 소맷돌, 초석, 기단석 등 석재가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 법인국사탑비     ©정진해
 


넓은 사지에 아직 밝혀내지 못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개울로 인해 두 지역으로 나누어진 사지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지역으로 더 이상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 아쉽다. 하루빨리 일대를 다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얻고자 하는 유물의 가치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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