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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 다투는 아홉마리용’ 머릿돌이 뜻하는 건!

2015.03.28 | 정진해 문화재 전문기자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현계산 기슭의 얕은 골짜기를 끼고 평탄한 들처럼 펼쳐진 거돈사지는 남한강변에서 약 4.5km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 거돈사지 전경    ©  정진해

* 거돈사터엔 아홉 마리 용이 주인을 기다린다.
  문화재명 :  원주 거돈사지(사적 제168호)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보물 제78호)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750호)
  소 재 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9번지 


거돈사지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번성했던 사찰로 보고 있으나 이를 밝힐 수 있는 문헌자료가 없다. 절터에 남아 있는 기와조각, 토기의 파편, 석물 등의 형태와 문양 등에서 시대를 추정할 수 있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으나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 통합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다시 선종도량이 되어 수행승들이 머물렀으며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 1145~1229) 등이 법맥을 이어왔다고 전한다.

약 7,500평의 절터, 발굴조사를 마치며 드러난 중문터, 석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면서 고려 초기에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보물 제78호)   ©  정진해
 
 
절터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종(930~1018)을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자리하고 있다. 국사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속성은 이 씨이며 전주인이다. 국사는 경기도 양평 사나사에 머물던 인도 승려 홍범(弘梵)에게서 득도하였고, 광종 10년(959) 중국 후주(後周)에 유학하여 공부하였다. 970년 귀국한 뒤 975년 중대사(重大師)와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그 뒤 대선사를 거쳐 왕사(王師)에까지 올랐다. 현종 9년(1018) 거돈사에 들어가 그해에 입적하였다.

비는 귀부, 비신, 이수로 구분되어 있으며,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구름 속에 용이 회유하는 형상의 이수를 얹은 모습이다. 귀부의 머리는 용이 머리를 형상화 하였으며 양쪽 귀 뒤에는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이 펼쳐져 있다. 등에는 귀갑문을 새기고 안쪽에는 ‘王’과 ‘卍(만)’, 연화문이 교대로 장식하였다.
 
비는 1025년(현종 16)에 세웠고, 최충이 비문을 지었으며, 김거웅(金巨雄)이 전액(篆額)을 쓰고 비문도 해서로 썼다. 각자는 승 정원(貞元)·계상(契想)·혜명(惠明)·득래(得來)·혜보(惠保) 등이 하였다. 비좌의 측면에는 연꽃측면윤곽문을 새기고 안쪽에 파수문을 새겼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아홉 마리의 용이 화염에 싸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현재도 원형대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  원주 거돈사지삼층석탑(보물 제750호)  ©  정진해
 
 
절터 북쪽 끝에 있었던 원종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은 고려 초기 팔각원당 형식의 대표적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 부도의 양식을 이어받아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하다. 현 위치로 환수되지 못한 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옥외 전시되어 있으며, 이 자리에는 2007년 11월 21일 국·도·시비 2억 원을 들여 재현품을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1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터에는 높은 축대 위에 중문을 세우고 그 뒤로 3층 석탑과 금당터, 강당터로 이어지고 있다. 금당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3단의 장대석과 판석으로 높은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전면 6칸, 측면 5칸의 주초석을 배열하였다. 중앙에는 불대좌가 자리하고 있으나 많이 파손되어 정확한 형태나 크기, 문양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의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제190호)  ©  정진해

 
금당 앞에 자리하고 있는 거돈사지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토단을 마련하고 3단의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3층의 석탑을 세웠다. 기단의 앞쪽에는 돌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둔덕지게 쌓아 4매의 장방형 판석을 엇물리기식으로 결구하여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하대석을 쌓았다. 중층기단과 하층기단 사이에는 장방형 판석을 놓고 4모서리에 우주와 각 면의 중간 지점에 탱주를 새겼다.

그 상부 낙수면 위로는 중석받침과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상층기단 중대면석은 남북 쪽에 양 우주가 표현하였고, 동서 면에 탱주만 새긴 면석을 끼워 맞추었다. 낙수면을 가진 상대갑석 위로는 몰딩과 각형 탑신 굄을 만들었다. 탑신부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을 한 돌로 구성하고, 각 층 몸돌에 양 우주를 새겼다.
 
지붕의 낙수면은 두꺼우면서도 끝 부분을 살짝 반전시켰고, 지붕받침은 각 5단씩 표현되었다. 지붕돌 상면에는 각형의 2단 굄으로 위층 몸돌을 받쳤고, 지붕돌마다 전각부에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 위에 복발만이 남아 있다.

토단의 돌계단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전면에 각 3개와 측면에는 각 1개의 연꽃측면 윤곽문을 음각하였으며 상부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 원주 거돈사지 미완성의 당간지주    ©  정진해
 
 
절터에서 약 30m거리의 계곡 건너 창고 마당에는 미완성의 거대한 당간지주가 눕혀있다. 이 돌을 운반하던 남매 장사 중 남동생이 죽게 되자 지주를 만들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절터의 서쪽 편에는 발굴작업중 수습된 각종 석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두었다. 사용처가 불분명한 석재들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그 시대의 화려하고 장엄한 사찰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모두 숨죽어 있으나 외롭게 홀로 생명을 유지해오며 절터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는 예나 지금이나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아준다. 흔적만 남기고 허공으로 사라진 400년의 역사를 몸소 보고 느껴왔던 느티나무는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부러지고, 썩어 들어가면서도 묵묵히 옛터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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