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등병 월급 1000환에 철조망 사이로 건넨 '떡'
2013.05.31 | 김인환

1950년 9월 하순 영천을 되찾은 우리 부대는 국도를 타고 경주로 향했다. 며칠 동안 줄기차게 내리던 비도 그쳤다. 길가 쪽마루가 있는 집에서
잠시 휴직을 취했다. 나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쪽 마루에 앉아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 후
전우가 흔들어 깨워 잠결에 일어나면서 진흙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왼쪽 다리오금이 펴지지 않았다. 진흙 바닥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다리
펴기 운동을 몇 번이나 한 후에야 겨우 전우의 도움을 받아 일어날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옷에 진흙이 잔뜩 묻어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길옆 도랑물로 대략 씻은 후 행군에 합류 하였다. 열일곱 소년병인 내 건강 상태는 당시 최악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밤 낮
전투에 시달리다보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피곤했다. 다시 행군이 시작됐다. 발바닥에 잡혀있는 물집이 터져서 무척 쓰라렸다.
경주 시가지로 들어섰지만 행군은 계속 되었다. 경주에 오니 생뚱맞게도 조상님들이 생각났다. 내 성은 김이고 본관은 경주다.
신라시대에 태어났다면 난 아마 왕족이었을 것이다. 경주는 그 옛날 신라시대에 내 조상들이 1000년 동안 다스렸던 땅이다. 내 할아버지들은
찬란한 역사를 간직 한 채 이곳 경주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이 생각이 들자 경주라는 곳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심신이
너무 괴로워 조상님들에게 매달려 무엇인가 계시를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자손인 김인환이 경주에
왔습니다. 저는 이 전쟁이 너무나 힘이 들고 고통스러우며 무섭습니다. 저에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용기를 주시고 이 목숨을 지켜
주시옵소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빌자 다소위안이 되는 듯 했고, 까닭모를 감동도 밀려 왔다. 우리 부대는 어떤 학교에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대포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최전선이 그다지 멀지 않는 듯 했다. 경주는 모두 피난을 갔는지 시가지에는 거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작전을 위하여 군인들과 군용차량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비록 학교 교실이지만, 오랜만에 지붕이 있는 곳에서
밤이슬을 맞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어서 좋았다. 계절은 9월 하순으로 넘어 가고 있었다. 밤에는 한기를 느낄 만큼 추웠다. 다행히 미제
야전잠바를 지급 받아 한기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아침밥을 먹기 바쁘게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우린 포항 방면으로 국도를
따라 행군을 시작하였다. 얼마를 가니 앞산에 포탄이 작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적군이 그곳 어디에 있는 것 같았다. 우리부대는 행군하는 도중
좌측언덕에 있는 적을 발견하고 추격을 시작했다. 적을 쫓아 언덕을 넘으니 마을이 있었다. 마을에 잠입한 적은 곳곳에 숨어 총을
쏘았다. 앞서 가던 전우가 적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 이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좌우 양쪽에서 마을을 포위 수색 했다. 대항 하던 적은
뒷산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따라 추격해 갔는데 도망 하던 적군은 산에 있는 적과 합류해서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소대장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나는 적진을 향해 총을 쏘며 공격해 올라갔다. 적군은 산 정상에 개인호와 교통호를 잘 구축 해놓고
있었다. 적은 교통호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우리에게 대항했다. 특히 위협적인 것은 기관총이었다. 기관총 탄알이 비 오듯 날아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나는 바위 뒤로 급히 몸을 피했다. 총알도 무섭지만 더 위협적인 건 적의 수류탄이었다. 한 발짝만 앞으로
나아가면 적 수류탄 사정권이었다.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하고 몸도 까딱 할 수 없는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바위에 탄알이 부딪치면서
‘삐웅’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돌파편도 날아왔다. 여기저기 부상자가 발생하여 위생병을 찾았지만 그 절규는 포탄
소리와 총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않았다. 다들 자기 몸 챙기기도 급한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부상병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곧 부상병 구출
작전이 시작됐다. 후방에서 포 지원 사격이 시작됐다. 동시에 소총수들도 엄호 사격을 시작했다. 그 틈에 몸이 성한 병사들은 잽싸게 부상자들을
들쳐 업고, 또는 들것에 싣고 뛰었다. 부상병들은 지르는 비명 소리와 그들을 구출하는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뒤섞여 한동안
아비규환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지옥이 따로 없는 처절한 광경이었다. 이때 후퇴 하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틈을 타서
뒤로 몸을 날려 뛰었다. 적탄은 전후좌우 사정없이 날아 왔으나 나는 용케 맞지 않고 적 탄막을 벗어났다. 나는 안전지대로 나오자마자 너무 지쳐서
나무에 몸을 기대고 주저앉아 버렸다. 잠시 후 쌕 하는 소리와 함께 꽝하면서 적 포탄이 떨어졌다. 화약 냄새와 먼지 폭음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전우가 “아이고 내죽네 하느님 살려 주시오” 하고 소리를 질러 돌아보니 시뻘건 피가 낭자했다. 옷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큰 부상 같았다. 그 후 그 전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일어서다가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에 파편을 맞은 것 같았다. 한 전우가 급히 와서 지혈을 해주었다. 많은 피가 흘러내려 바지 안에
응고 되어 있어서 바지를 걷어 올려 굳은 피를 털어냈다. 그 전우가 나를 엎고 산을 내려와 차에 태워 주었다. 이판에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치료를 잘 받으라고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그 전우에게 어제 지급받은 야전잠바를 건네주며 부디 죽지 말고 꼭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당부 했다.
나는
경주여고에 있는 제15육군병원에 도착하였다. 병원은 밀려오는 부상병으로 도떼기시장 같았다. 의료진이 부족한 것 같았다. 응급처치가 늦어지자
부상병들이 아픔에 못 이겨 고함치듯 신음소리를 냈다. 어떤 환자는 군의관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생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린 후에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군의관이 부상당한 곳을 한 뼘 정도 되는 의료기구로 후벼댔다. 파편이 살
속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너무 고통이 심해 난 고함을 질렀다. 군위관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건 이해 할 수 있었지만, 환자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치료는 불만스러웠다. 응급처치를 한 후, 담요를 한 장 주었다. 난 그 담요를 깔고 교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친 다리는 아프고 몸이 떨려서 견딜 수 없었다. 야전잠바를 전우에게 주고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병실로 쓰이는
교실은 환자들 아픔에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죽어나가는 부상병도 속출했다. 교실 한구석에 낮 익은 부상병이 앉아있었다. 우리 집에서 농사일을 돕던
이종환 이었다. 내가 곁에 가서 종환이 아니가 하니 아는 표정을 하는데 말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아픔에 못 이겨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군의관이 회진을 와서 종환이 옆구리를 주사기로 찔러 죽은피를 반 사발 정도 뽑아냈다. 그 고통을 견뎌 내기
위한 표정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총알이 가슴을 뚫고 등 뒤로 지나간 듯 했다. 종환이 가슴과 등에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피가 배속으로 흘러내려 고여서 배속에 고여 있는 피를 뽑아준 것이었다. 옆에서 보니 눕지도 못하고 벽에 기대어 앉아만 있었다.
통증이 심하니까 진통제를 주어 잠을 재웠다. 자고 일어나서는 아픔을 못 이겨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옆에 한 부상병은 배창자가
삐어져 나와 있었다. 아무 감각이 없는지 자는 것 같이 누워만 있었다. 군의관이 와서 창자를 닦아 주고 치료를 해주는데 너무 끔직 하였다. 이런
환자들과 함께하는 병원 생활이 계속되었다. 밤에는 말도 못하게 추웠다. 그리고 늘 악취가 진동해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참으로 열악한 병원 환경이었다. 교실 뒤 창고에는 시체가 방치돼 있었다. 그 시체 앞에서 사람들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가족들인 듯 했다.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상처 난 곳이 아파서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배고픔
이었다. 배고픔이 길어지자 의식이 없는 중환자의 식사를 몰래 먹어 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남의 밥을 몰래 먹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병원에서는 안남미로 지은 밥을 주었다. 찰기가 없어 불면 날아 갈 것 같은 밥이었다. 장병들은 모두 한창
나이라 식욕이 왕성했다. 밥을 너무 적게 주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가족이 면회를 와서 음식 먹는 광경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해 9월 말경으로 기억 된다. 2등 병 봉급 1000환을 받았다. 배가 너무나 고파서 학교 철조망 울타리 밖에서 떡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떡을 사려고 하였다. 그 아주머니는 돈부터 먼저 내라고 하였다. 떡을 먼저 주니까 돈은 주지 않고 달아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다고 했다. 나는 철조망 사이로 돈을 먼저 준 다음에 인절미를 받았다. 그 떡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돈 1000환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목숨을 걸고 최초로 번 돈이었다. 그 가치가 한번 허기를 면 할
수 있는 떡값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최소한 다친 장병들 배는 고프지 않게 해주어야 상처도 빨리 회복 될 텐데,
국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높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배고픔에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나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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