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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땅을 에워싸고 있는 포천 반월성지

2015.09.21 | 정진해 문화재전문기자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에 우뚝 솟아 있는 청성산에 테뫼식 반월성지를 찾아 나섰다. 의정부에서 축석고개를 넘는다. 넓은 도로만큼이나 많은 차들이 오가는 축석고개는 언제나 차들의 요란스러운 움직임으로 갈길이 바쁜 곳이다.

오른쪽으로 길게 북동쪽으로 향하는 산줄기는 한북정맥이고 왼쪽으로 엎드려 저 멀리 회암사지의 천보산, 해룡산을 지나 한북정맥에서 갈라진 왕방지맥과 함께 포천을 에워싸고 있는 형상이다. 포천의 끝이 어디서 어디냐고 질문을 던지면 “알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가장 현명할 것 같다.
 
 
▲ 구읍리석불입상     ©정진해
 

포천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조망되는 길목에 성 쌓고 ‘치열한 혈전’

긴 내(川)를 안고 있는 땅(抱)이라는 의미로 ‘포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포천은 길고 긴 땅이다. 축석고개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가다보면 언제쯤이면 철원에 이를까할 정도이다. 포천의 젓줄인 포천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지 않고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영평천에 이르면 합세하여 서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얼마나 흘러갈까 다시 한탄강을 만나 더 큰 강이 되고 다시 임진강을 만나서 서해바다로 향해 떠난다. 한강과 임진강을 만나면 그 힘도 모두 소진되어 조용히 흐르는 조강이 되어 유유히 서해의 짠물과 만나 성질까지 변해버린다.
 
옛 겸재 정선 현감은 금강산을 가기 위해 이 길을 걷다가 한탄강의 아름다운 경치에 발길을 놓고 화적연이란 화제의 그림 한 폭을 남겼다.

그 길은 이제 국도 제43호로 다시 포천시내를 가로질러 금강산으로 향하고 있다. 그 길목에 포천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조망되는 길목에 성을 쌓고 치열한 혈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한다.
 
포천 시가에서 동쪽으로 보면 우뚝 솟아 있는 청성산(일명 반월산)에 각을 이루는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성상까지 오르는 길은 청성공원에서 충혼탑과 반월각에 이르면 숲길을 따라 쉬엄쉬엄 걸다보면 어느새 치성이 앞에 가로막는다. 또 하나의 길은 성의 남쪽에 있다.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던 길로, 자동차가 오를 만큼의 넓이에 포장까지 되어 있어 있지만, 산책을 한다는 생각으로 오르면 쉽게 오르는 길이다.
 
 
▲ 반월성 동문과 건물터     ©정진해
 

산성을 오르기 전 청성사거리에서 용정교 동쪽에 용화사 법당 내에 봉안되어 있는 구읍리 미륵불상을 지나칠 수 없다. 법안 안에서 불상으로 보면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높이만도 4m가 넘는 거석불로 일부는 석고로 손상된 부분을 원형으로 복원하였지만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몸에 비해 얼굴이 크고 머리에 쓴 보관 위에 지붕돌을 얹어 짜임새를 잃어 보인다. 수인은 오른손 손가락은 엄지에 중지, 소지가 닿고 있으며, 오른 손은 펴 있는 상태로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 수 없다. 입고 있는 통의는 좌우 어깨에 많은 주름이 있으며, 목에는 3도가 뚜렷하다.
 
머리에 쓴 보관의 정면에는 광배 안에 불상을 새겼고 주위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특히 머리에 올린 지붕돌은 표면이 매우 거칠며, 불상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 올린 것이 아닌 것 같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포천향교를 향했다. 이 곳 구읍리는 지금의 포천시가 들어서기 전에 이곳이 읍내여서 부르는 지명이다. 구읍리 삼거리에서 청성산 방향으로 오르면 포천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 반월성 장대지     ©정진해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교육기관으로 양민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사장학(詞章學)과 경학(經學)이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기도 하며,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이 향교는 1173년(고려 명종 3)에 처음 세워졌다고 하며, 1592년(조선 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954년(선조 27)에 다시 지어 6.25 전쟁 이전까지 향교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다시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다가 1962년에 포천 유림들이 모여 또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학후묘의 형태로 배치된 공간에는 외삼문을 시작으로 동․서재가 좌우로 배치되고 정면에는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 뒤쪽에는 내삼문과 대성전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은 5칸으로 이루어졌으며 중간 3칸은 솟을삼문을 달고, 좌우에는 방화벽을 쌓고 방을 하나씩 두었다. 명륜당은 정면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 포천향교     ©정진해
 

2단의 기간을 계단식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초석으로 놓고 기둥을 세워 주심포로 짠 가구이다. 좌측 1칸은 띠살문 두 짝을 달고 창방 위쪽에 벽을 두었고, 현판이 걸려있는 칸은 좌우 칸에 비해 조금 큰 4분합문을 달았다. 명륜당 뒤편의 내삼문은 솟을삼문이며 명륜당 공간과 대성전 공간을 구분하기 위한 토석담을 쌓고 기와지붕을 얹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풍판을 단 맞배지붕의 건물로, 원형으로 잘 다듬은 초석을 두고 주심포 형식의 가구로 구성되었다. 정면 1칸은 공간을 두고 두 번째 공간은 제향공간으로 각 칸에 두 짝의 띠살문을 달았다. 명륜당과 달리 기단은 크기가 일정치 않은 돌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3단으로 기단을 쌓고 앞에 2단의 계단을 3곳에 두었다.
 
향교 동쪽 편을 돌아 약 100m 정도 오르면 불단 위에 서 있는 석불입상이 있다. 절터는 숲이 우거지고 계곡이 있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불상 주변에는 기와파편과 토기파편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불상을 보호하는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 구읍리미륵불상     ©정진해
 

불상은 심하게 마모되어 얼굴과 몸의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며, 허리부분까지 매몰되어 있어 전체의 크기와 형태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석물을 용화사 법당내의 불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초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건립도 그때를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뒤돌아 군내면사무소 방향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해발 283.5m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숲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아직 복원이 되지 않는 부분과 복원이 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남쪽은 아직 복원이 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지만 동쪽을 시작으로 서쪽에 이르기까지는 잘 복원되어 있어 성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복원공사가 중지된 동쪽과 남쪽의 꺾어지는 부분은 마치 치성과 같은 형태로 동쪽성벽을 볼 수 있는 위치이며 바로 옆에 동문이 자리하고 있다.
 
동문 밖에서는 사다리가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현문식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성문에는 문루가 있었던 흔적은 있으나 그 규모와 형태는 알 수 없고 다만 문루가 있었던 아래에 계단을 통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문 뒷면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지가 남아 있어,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임을 가름할 수 있다. 동쪽 성상로를 따라 정상으로 가다보면 감시초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모퉁이 성벽이 동쪽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동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이 청성산의 정상이다. 이곳에는 군사들을 지휘하였던 장대지로 많은 석재와 건물터가 남아 있다.

이곳 장대에서 지휘하던 처음 장수는 백제의 어느 장수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두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남진정책으로 이 성을 탈환하여 미쳐 다 축성하지 못했던 부분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 후 이 성은 조선에 이르기까지 포천지역을 지키는 주성으로 그 역할을 해왔다.

장대지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북쪽 성벽은 자동차가 지나갈 만큼의 넓은 성상을 이루고 있으며, 경사가 심해 쉽게 적으로부터 침입을 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저 멀리 철원을 지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까지 조망되는 곳이어서 쉽게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다.
 
성은 지금의 포천시가지 방향으로 경사를 이룬다. 다시 평지를 이루는 곳에 암문과도 같은 북문이 자리하고 있다. 겨우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좁은 통로로 이루어졌다. 북문의 위에도 누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암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북쪽 성문과 가까이 있는 서쪽 성벽은 치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포천시내를 한눈에 조망되는 곳인 반면 당시 포천변을 오가던 사람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치성 옆에는 청성공원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어 더 이상 복원은 하지 않고 있으며 바로 남쪽 성벽이 시작되는 곳에는 남문이 있었던 자리이다.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으나 문루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4개의 주초석이 남아 있다.

 
▲ 반월성 성벽(북쪽)과 치성(서쪽)     ©정진해
 

북문과 치성, 남문 안쪽에는 넓은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 1994년부터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성벽과 치성 4곳, 장대지 및 망대지 2곳, 우물지, 건물지 등이 확인 되었는데,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고 새겨진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마홀군'이 바로 포천이고 이 성이 고구려가 쌓은 성이라는 근거가 되었다. 2001년에 6차 발굴조사 때는 백제와 신라토기가 대량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성은 먼저 백제가 축성하여 4세기 후반까지 소임을 수행하다가 고구려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이 지역이 고구려 영토로 되었다. 다시 신라 진흥왕 때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신라의 북진진출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통일신라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후삼국 시대가 되면서 궁예세력이 이 성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건에 의해 쫓긴 궁예가 이 성을 다시 고쳐 쌓고 왕건세력에 저항했다는 근거가 포천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궁예이후 고려시대에는 개성이 도읍지가 되면서 이 성도 존재가치를 잃게 되었다. 다시 조선시대에 들어와 광해군 때 청나라의 침략에 대하여 "1618년 영평현에 감영을 두고 이 성을 수축하였으며 중군을 설치하여 인조 원년(1623)에 혁파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즉 이곳에 절도사의 직할군을 주둔시켰다는 내용이다. 
 
반달처럼 생긴 성이라 이름이 붙어진 반월성의 둘레는 1,080m이다. 이 성을 쌓기 위해 돌은 어디에서 운반되었으며, 성의 내탁은 어떻게 채워졌으며, 성상의 넓이는 왜 넓어야 하며, 여장이 있었을까 하는 등, 좀 더 구체적이면서 간결한 내용이 안내판에 기록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 산성으로서의 기능과 역사적 성격은 물론이거니와 고대사를 규명하면서 차차 같은 시대에 축성된 산성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산성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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