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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파사왕 쌓았다는 여주시 ‘파사성’
2015.09.14 | 정진해 문화재전문기자

문화재 : 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71호) 기천서원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여주 파사성 (사적 제251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한국NGO신문] 정진해 문화재전문기자 = 남한강 줄기를 따라 걷고 또 걷다보면 인접한 곳에 옛 사찰의 흔적과 나루터의 흔적을 만난다. 이곳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과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에 걸쳐있는 성곽은 왜 이곳에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지 산성을 오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이포대교와 이포보가 걸쳐있는 이곳은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가 마주보고 있는 행정구역이다. 용문산에서 내려오는 준령이 긴 여정에 잔잔한 명경지주와도 같은 강변에 작은 봉우리 하나를 잡고 있다. 여기에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하는 파사성이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이포나루는 아우라지에서 출발한 땟목이 이곳에 도착되면서 한시름 놓았다며 정선아리랑을 불렀던 곳이고, 텁텁한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도 풀었던 나루터였다. ‘이포’라는 지명은 곧 ‘배개’, 곧 ‘배가 닿는 터‘에서 불러진 명칭이다. 배나무, 배개나루, 천양나루라고도 불렀던 이포나루는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로 연결시켜준 교통수단이었다. 여주·이천·양평으로 이어지는 교통요충지로 여주 동쪽 양평 지제 및 문막, 원주지역 주민들을 이천 시장이나 서울 시장과 연결시켜주는 주요 통로역할을 했었다.
이포나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 폐현인 천령현에 관에서 설치한 나루 ’진강도‘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이포는 여주군 대송면에 속하며, 여주읍의 하류 2리쯤, 강의 남단에 있다.
농업지역이지만 상인도 적지 않은데, 대개 선승업자이다. 목재를 매입하기 위해 내지(일본인) 상인도 때때로 오며, 일찍이 5명이 정주한 바 있다. 선승을 업으로 하는 자가 있으나 낚시는 행해지지 않으며, 이곳의 물 흐름은 폭이 1정 반, 수심이 1심 내지 3심으로 물살이 완만하다.“고 하였다. 또한 <치수급수리답사서>에 의하면 ‘이포는 복하천 합류점의 하류로 어느 정도 시가를 형성하였고 오지에는 광활한 평야지대가 있으며, 이천시장과의 거래가 있어 물자의 집산량이 많고, 나루는 수심이 깊어 비교적 양호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천 산수유마을을 둘러보고 금사면 이포리에서 잠시 ‘기천서원지’를 둘러보았다. 이포리 마을에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오르면 이포마을과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서원이다. 이 서원은 이언적, 김안국, 홍인우, 이원익, 정엽, 이식, 홍명구 등 8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조선 중종부터 효종까지 이름난 현인들이다.
정면의 외삼문과 동재, 서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조 13년(1580년)에 처음 지어졌다. 인조 3년(1625)에 임금이 직접 ’기천’이라는 편액을 내려 사액서원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1937년 사당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다. 공포는 익공양식을 꾸몄으며, 동재와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
서원에서 이포대교를 건너 좌측으로 약 200m에 이르면 파사성 주차장이 잘 꾸며져 있다. 주차장에서 약 900m의 거리에 파사성의 정상에 이른다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성상으로 오르는 비포장도로는 비가 내린 만큼 패여 있지만 좌우로 야생화가 여름을 마지막 보내기 위한 꽃을 피우고 있다. 벌써 밤송이가 입을 벌려 밤톨을 내려고 있다.
몇 개 주섬주섬 주어서 배낭에 담고 경사진 길을 따라 걸었다. 갈참나무와 상수리나무는 거위벌레의 생존방식에 처참하게 도토리와 함께 땅에 가득 잘려 떨어져 있다. 이맘때면 거위벌레는 온 산천에 참나무를 찾아 도토리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 한 개의 알을 낳고는 가지를 날카로운 입으로 땅으로 떨어뜨린다.
오르며 뒤돌아보면 점점 시야가 넓어지면서 남한강의 남과 북쪽의 길이만큼 눈에 들어온다. 몇 해 전에 4대강 정비 사업을 위해 만들었던 이포 보는 백로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모습으로 건설되었다. ‘생명의 탄생과 비상’이라는 주제를 갖는다. 오르면 오를수록 확연히 들어내는 이포 보는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만들려고 많은 공을 들였으나, 자연의 환경을 역행한다는 수많은 조사에서 드러났지만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려야 이러한 결점도 조용히 남한강 물밑에 잠길 것인가 지켜볼 일이다.
왜 이곳에 성을 쌓아야만했던 답이 서서히 드러나 보인다. 남문지에 이르니 무너진 상태로 덮개로 씌워 두었다. 남문의 좌우가 어떤 모습이라는 것도 대충 형태만 보아서 알 것만 같다. 8각의 장초석 2개가 이곳에 문루가 있었음을 증명이라도 해 줄듯 하다. 그 위에 놓인 기둥과 성문, 문루가 남아 있지 않는데, 추정하고 성상을 걸어야만 했다. 주위는 온통 칡넝쿨이 덮어 버렸다. 남문지에서 남쪽 성상을 걸어보았지만 건물터로 보이는 넓은 공터에 줄기를 뻗고 있는 칡과 싸리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동문까지 가는 동안 성벽의 높이를 알 수 없고 축성된 성벽을 들어다 볼 수 없었다. 빼곡히 우거져 있는 나무와 야생초가 서로 엉겨 한 발짝도 성벽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없었다. 너무 아쉬움이 많았다. 이제 성벽은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성벽 주변에 자라고 있는 식물을 제거한다면 더욱 가까이서 접근하여 축성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바램이다.
이곳의 파사성은 이포나루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파사산의 능선을 따라 돌을 다듬어 축성된 성이다. 오래전부터 신라 파사왕 때 이 성을 쌓았다고 전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유구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출토되었으니, 이 성은 삼국시대의 백제나 신라중에 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접근성이 강한 것 같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건의로 승군 총섭 의엄이 승군을 동원하여 3년에 걸쳐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축성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남문과 동문지에는 옹성으로 축성될만한 공간도 없거니와 그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있다.
남쪽으로 뻗어있는 남한강 줄기와 들판, 북쪽으로 뻗어 있는 강줄기와 들판은 곡창지대로 광활한 농토이다. 동쪽으로 많은 가옥과 들, 높고 낮은 산이 형성되어 있어 가옥은 산 뒤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산과 산 사이에 펼쳐진 들은 마치 모자이크를 해 놓은 미술품으로 펼쳐져 있다. 동문으로 가는 길은 안과 밖이 칡넝쿨이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엉켜 있다. 매우 희귀한 하얀 칡꽃이 피어있었다. 칡꽃은 자주색에 붉은 꽃잎이 아래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위까지 필 때까지는 몇 날 며칠이 소요된다. 흰 칡꽃을 향해 몇 컷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동문까지 오는 동안 성벽을 볼 수 없었다. 동문을 나서는 순간 좌측에 성벽이 쌓아 있는 모습에 보였다.
크고 작은 돌을 적당히 다듬어 쌓은 성돌은 이곳에서 수집된 돌이다. 정상부분에는 조금 남아 있는 성돌 위에 최근에 새롭게 복원 하면서 그 높이가 약 6m 이른다. 우뚝 솟아 있는 성상 정상에는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이다.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찍 고려 말에 이색 선생이 파사성에 올라 남한강과 들판을 바라보며 짧은 시 한수를 읊었다. “婆城望雨(파성망우) 하늘 뜻은 응당 만물을 살리고 농사일은 때 미처 함에 있네./푸른 못에 용이 누운 지 오래인데,/한 번 일어남이 어찌하여 더딘가.“
유성룡도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파사성‘의 시 한수를 지었다. 婆娑城上草芊芊(파사성상초천천) 파사성 위에 풀이 무성하고/ 婆娑城下水縈廻(파사성하수영회)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둥글굽어 돈다. <이하 생략>
성상에서 약 200m떨어진 곳에 수직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 입상(경기유형문화재 제171호)이 있다. 누구에 의해 이곳에 새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균형이 잡히고 어깨가 각이져 있어 당당한 모습으로 보인다. 우견편단식 옷을 입고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다. 이중 두광을 갖춘 넓적한 얼굴과 각이 진 팔꿈치, 옷주름, 선각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시 뒤돌아 성상에 오르니 주변의 곳곳이 눈에 가득 찬다. 이곳부터 서벽은 최근에 복원하여 마치 자동찻길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넓은 성상로는 지형을 따라가며 쌓은 성이 마치 마을에 논두렁 같이 보인다.
성내에는 동문터와 남문터를 제외하고 수구지, 우물터, 각종 건물터가 남아 있다고 하나 성내에 칡이 덮고 있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성은 전체 길이가 936m 기록되어 있고 최대 높이가 6.5m에 이른다고 하였다. 우거진 숲에서 진주알을 찾는다는 것은 잘못이었다. 이제 산성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닌 영구히 보존을 위하고 학술적 가치를 찾는데 일조를 해야할 단계이다. 언제나 성곽을 둘러볼 수 있도록 성곽을 훼손하는 나무를 제거한다면 더욱 진주알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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