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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유교의 소통, 19세기 봉은사 & 추사 김정희

2014.09.29 | 김성호 기자



불교중앙박물관(관장 화범스님)과 봉은사(주지 원학스님)는 공동주관으로 19세기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불교와 유교의 소통을 조명하고자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불교중앙박물관은 이와 관련 지난 25일(목) 오후3시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하여 각계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을 진행하고 전시장 테이프 컷팅을 하고 김추연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했다.

 

 

 

 

 

이번 전시는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의 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관념을 뛰어넘는 조선후기 유학자와 스님간의 교류가 얼마나 빈번했는가를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와의 관계를 통해 조명하였다. 아울러 기존의 전시와는 달리 문인으로서의 김정희에 집중하기 보다는 유학과 불교학은 그 경계에 따라 다를 뿐 본질이 소통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김정희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스님들과 김정희의 교유관계를 통해 김정희와 관련된 사찰소장문화재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장으로, 김정희가 33세에 쓴 <해인사 대적광전 중건 상량문>을 비롯하여 보물3건, 지방문화재 5건의 77건 124점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은해사 소장 편액 <불광>, <대웅전>등을 서울에서 처음 공개했다.

 

봉은사의 19세기 판각은 남호 영기, 운구 한민, 그리고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호봉 응규스님 등이 주도하였는데, 이 불사의 완성으로 김정희가 자신의 마지막 생애 3일전의 쓴 <판전> 현판 글씨는 과연 추사체의 완성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회향이라 할 수 있다.

 

 

 

 

 

전시 구성 첫번째 ... 도심 속 천년고찰, 봉은사의 역사

 

수도산 봉은사는 오랜 기간 도심 속에서 법등을 밝혀온 고찰이다. 조선시대에 정현왕후와 허응당 보우스님의 노력으로 견성사를 확장하여 봉은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연산군 6년(1501)에는 정현왕후의 명으로 봉은사에 왕패를 하사하고 왕릉 추복사찰로 주목 받기 시작 하였다.

 

이후 명종 5년(1550년)에 문정왕후가 선교 양종을 되살리고 봉은사를 선종수사찰로 삼았으며 중종2년(1502년) 승과를 봉은사에서 다시 시행하여 조선 불교계를 이끌었던 청허당 휴정, 사명당 유정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을 거치며 전소된 봉은사는 경림스님과 선화스님이 중심이 되어 중창하였으며, 이후에도 봉은사의 중창과 중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정조 14년(1790)에는 봉선사, 남한산성의 개운사, 북한산성의 중흥사, 용주사와 함께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5 규정소糾正所의 하나로 꼽히는 등 선종수사찰로서 봉은사의 위상은 계속 이어졌다.

 

전시 구성 두 번째 축 ... 김정희와 봉은사의 만남

 

추사 김정희(1786-1856)는 19세기 조선의 학계와 문단, 그리고 서단과 화단을 움직였던 학자이자 예술가다. 김정희의 집안은 불교를 신앙한 대표적인 가문으로, 화암사를 원찰로 둘 정도로 불교와 관련이 깊었으며,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은 해붕스님과 교유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김정희는 33세에 「해인사중건상량문」을 썼는데, 이 상량문에서는 불교와 역사를 자유자재로 끌어내어 서술하고 있어, 그의 불교지식이 얼마나 해박하였는지 알 수 있다. 김정희가 초의스님을 만난 것도 30세로, 이른 시기부터 스님들과도 교유했음을 알 수 있다.

 

스님들과의 교유관계를 유지하면서, 만년의 김정희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다녀온 이후 경기도 과천의 과지초당에 은거하였다. 이에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찰인 봉은사에 왕래하며 스님들과 교분을 쌓고, 후에는 봉은사에 방을 두고 기거하기도 하였다. 당시 봉은사에서는 남호 영기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을 판각하는 판전 불사가 완성된 후, 판전의 현판을 썼다.

 

세 번째 전시 주제 ...김정희를 통한 유학과 불교와의 소통

 

조선후기는 그동안 불교의 끝없는 나락으로만 이해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유학 자와 스님 간의 교유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유는 조선 사림 안에서 일었던 사상의 변화와 유교에 대한 승가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붕당의 바람이 세 찬 시기를 지나 18세기에 이르면 북인을 포함한 남인, 소론, 그리고 노론중 낙론에 속하는 학자들은 불교에 대한 관심과 스님들과의 교유를 넓혀갔다. 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학문적인 경향이 탈주자적인 성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이 추사 김정희로, 그는 불교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유학과 불교와의 소통에 적극적이었다. 김정희는 초의스님과는 도반이라 할 정도로 40여년 세월 동안 교유했으며, 당대 스님들과 친밀하고 폭넓게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당시 불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던 선학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김정희는 스님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갔으며, 불교에 대해서 비판과 포용의 과정을 통해 소통하였다. 유교와 불교는 그 경계에 따라 다를 뿐 산은 하나의 산인 것처럼 그 본질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인 네 번째 .... 근·현대의 봉은사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시행규칙’ 반포로 한국불교는 일제의 식민지 불교체제로 편입되었다. 봉은사는 서울·경기 일대의 본산으로 지정되어, 서울을 비롯한 광주·고양 등 8군 78개 말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2년 사찰령 반포 후 봉은사의 첫 주지로 취임한 청호스님(1875-1934)은 근대 봉은사의 역사에 있어서 생생한 발자취를 남겼다. 을축년(1925) 7월 17일, 한강을 덮친 대홍수 때 청호스님은 사중을 불러 모아 708명의 인명을 구하고, 재물을 풀어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이에 광주와 고양 주민들이 수해구제공덕비를 세우고, 당시의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는 각종 시와 글, 그림을 모아 불괴비첩이 만들어졌다. 봉은사는 도심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22년의 마포 포교당을 시작으로 모두 6개의 포교당을 개설하여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펼쳤다. 1983년 추사 김정희 탄생 200주기를 맞이하여 기적비를 세우고, 1996년에는 미륵대불이 조성되는 등 전통사찰의 보존 속에서 도심사찰로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번 특별전은 12월 14일까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내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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