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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음령을 넘어 만난 왕과 왕비 ‘마애이불입상’

2015.04.24 | 정진해 문화재전문기자



혜음령은 예부터 개성과 한양을 오가는 사람들의 편안한 길이었고, 중국 사신이나 연행사도 이 령을 넘어서 한양으로 갔었다고 한다.
 
예부터 파주와 고양의 경계였으나 지금도 두 지역의 경계에 있는 령이다. 일찍 『신증동국여지승람』파주목 편에는 혜음령이 파주 읍치의 남쪽 35리 지점에 위치하며 고양군 경계를 형성하고 혜음원과 고 혜음사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파주목 편에서도 위치에 대한 내용이 같게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펴낸 『고양군지』에는 ’북쪽 5리에 양주와의 경계 지점이다.‘라 기록하였다.
 
또한 『해동지도』와 『광여도』 등에서는 고양과 파주의 경계부에 표기되었으며, 『조선지도』와 『팔도군현지도』에 표기된 바에 따르면 ’벽제역 북쪽에 위치하는 혜음령은 파주와의 경계를 형성하며 동으로는 양주와 경계를 형성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지도』나 『1872년지방지도』에 따르면 파주군의 가장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국 사신이나 연행사들이 혜음령과 고양 읍내를 거쳐 서울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혜음령은 한양의 관문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 파주 혜음원지 전경 (사적 제464호)  © 정진해
 
 
문화재명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
소 재 지 :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 9번지


혜음령을 넘으면 고혜음사가 있고 혜음원이 있다고 하였다.(사적 제464호) 지금의 혜음원 자리에는 사찰이었다가 후에 원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과정에서 금동여래상이 출토되었다. 『동문선(東文選)』 권64기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의하면 혜음원의 창건은 남경(한양)과 개성 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고려 예종 17년(1122)에 건립된 국립숙박시설이며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도 축조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혜음원의 창건배경과 그 과정, 창건과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다.

혜음원지에서 광탄면으로 가다보면 한적한 곳에 “장지산용암사”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에 지은 대웅보전과 박정희대통령이 기증한 석등과 최근에 만든 석탑, 미륵전, 그리고 종각이 한 구획을 이루었다.
 
이승만 박사는 1953년 10월 11일 용미리 석불을 시찰하며 1954년 10월 28일에 개수와 동자상, 7층 석탑을 이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을 비롯, 이기붕 국회의장, 내무장관, 문교장관, 경기지사, 파주군수에 미국대사 부부, 미 제1사단장까지 참석하여 ‘미륵불 이대통령각하 기념탑 봉안식’ 을 거행하였다.

 
▲ 전면에서 본 입상     © 정진해
 
 
계단을 오르며 모습을 드러내는 두 마애불은 앞산을 바라보고 있다. 고려의 13대 선종은 첫째부인 둘째부인에서 자식이 없자 셋째부인인 원신궁주 이씨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궁주는 못내 걱정하던 중 꿈속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아래 사는 사람이오.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 있으면 부탁드립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꿈 내용을 왕께 아뢰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이곳에 온 사람은 장지산을 둘러보고, 왕께 “장지산 남쪽 기슭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왕은 궁주의 꿈속에 나타난 두 사람이 바로 이 바위임을 알고 즉시 두 석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다. 그 해에 원신궁주에게는 태기가 있었고,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 뒷면에서 본 입상     © 정진해
 
 
거대한 천연암석에 조성된 석상은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으며, 두 석상은 각각 둥근 갓(원립상)과 사각의 갓(방립상)을 쓰고 있다. 왼편의 석상 얼굴은 달걀형에 가깝고 오른쪽 석상 얼굴은 네모진 방형에 가깝다. 두 석상이 모두 가슴에 군의(裙衣)를 맨 띠 매듭이 선명하고 그 아래 U자형의 옷 주름이 아래로 부드럽게 새김되어 자연스럽게 자비스러움으로 표현하였다.
 
왼편의 원립상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은 채 왼손으로 줄기가 있는 꽃을 쥐고 있는데 줄기만 보이고 꽃은 떨어져 나갔다. 오른쪽의 방립상은 두 손을 합장하고 있어 그 간절함이 더해 보이지만 손의 위치가 왼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 모습이다. 두 석상은 서로 나란히 남자와 여자를 표현하였다. 꽃을 들고 누구에게 받치려하지만 앞에는 아무도 없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지만 그 대상은 누구인가?

1995년에 발견된 방립상 석상 아래쪽의 명문에서 두 기의 석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 아닌, 1465년(세조 11년)에 국왕(세조)과 왕비(정희황후)의 모습을 조각한 것임을 밝혀졌다. 명문에 따르면 용미리석불은 세조의 왕생정토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며, 그 연대는 상종 2년(1471)이다. 양녕대군의 아들 함양군(1416~1474)과 한명회 셋째 부인으로 추정되는 정경부인 이씨 등이 시주로, 왕실과 밀착된 승려 혜심(惠心)이 화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 새겨진 내용이라면 고려시대의 조각 수법에 의해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석상이 만들어진 이곳은 옛 개성을 오가던 길목에 조성된 것은 왕위 찬탈로 백성들에게 참회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 석상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도 된다.

석상 앞에는 알림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아쉽게도 그 내용대로라면 문화재 보호 지역이다. 4단의 쇠파이프로 설치물을 만들고 그곳에 많은 연등을 걸어 문화재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자유마저 멈추게 하였다. 문화재는 눈으로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왜 이곳에 이 많은 연등을 달아야하는 걸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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